조선시대 이지항 장군의 아이누족 탐험기 조선시대 이지항 장군의 아이누족 탐험기 표주록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이지항
조선시대 이지항 장군의 아이누족 탐험기 표주록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이지항 장군은 아이누족이 활동하는 훗카이도까지 어떻게 탐험을 가게 됐나요?
조선시대 이지항 장군(이선달이라고도 기록됨)의 **『표주록(漂舟錄)』**은 조선 후기 영조 연간(1696년 숙종 22년 ~ 1697년 영조 32년)에 그가 훗카이도(당시 에조지방)까지 표류하여 겪은 일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표류기입니다.
이지항 장군의 아이누족 탐험기 『표주록』에 대하여
『표주록』은 이지항이 부산에서 영해(寧海)로 가던 중 배가 파손되어 표류한 경험을 일기체 형식으로 엮은 기록입니다. 1696년(숙종 22) 4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5일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약 1년여의 기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표류기에는 당시 일본의 정권이 미치지 않던 아이누족의 땅, 홋카이도에서 아이누족을 만나 교류했던 생생한 경험이 담겨 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아이누족과의 만남과 교류: 이지항 일행은 홋카이도 해안에 표착한 후 아이누족과 마주쳤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외모와 풍습에 두려움을 느꼈으나, 아이누족은 그들에게 생선국과 어포 등 음식을 제공하며 친절하게 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지항은 아이누족의 생업(수렵과 어로), 식생활(주식은 생선, 연어 훈제 등), 복식, 풍습 등을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특히 수염을 길게 기르는 아이누족 노인에 대한 묘사 등 구체적인 인상착의와 행동에 대한 기록이 흥미롭습니다.
표류 과정: 부산에서 영해로 가던 중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만나 배가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며칠 밤낮을 큰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다가 홋카이도에 닿게 됩니다. 생쌀을 씹어 먹고 약간의 물로 목숨을 유지하며 버텨낸 절박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홋카이도 체류: 홋카이도 최북단에 표착한 이들은 약 110일 동안 홋카이도에 머물렀습니다. 아이누족의 도움을 받아 생존하고, 이후 일본인의 도움으로 귀국 길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 『표주록』에는 당시 조선인들이 아이누족에 대해 "왜인은 확실히 아니고 끝내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낯설어했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의 세계관과 지리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부록: 『표주록』 맨 끝에는 강항의 『간양록』 중 에조(아이누) 지방에 언급된 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안남국(베트남)을 세 번이나 왕래한 조완벽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이는 이지항이 자신의 표류 경험을 기록하면서 당시 알려진 다른 표류기록을 참고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지항 장군은 훗카이도까지 어떻게 탐험을 가게 됐나요?
이지항 장군이 홋카이도까지 "탐험"을 가게 된 것은 의도적인 탐험이 아니라, 사고에 의한 우발적인 표류 때문입니다.
그는 원래 군관으로서 부친의 상을 마친 후 강원도 영해(寧海)로 왕래할 일이 생겨 부산에서 배를 탔습니다. 이때 부산 사람 공철(孔哲), 김백선(金白善) 등과 함께 생선 대량 구입을 위해 강원도로 가는 김여방(金汝芳)의 배에 동승하게 되었습니다.
배는 동해(당시 '좌해'로 표시)를 따라 항해를 시작했으나, 1696년 4월 28일 바람이 조금 잦아든 틈을 타 다시 움직이던 중 갑자기 강력한 횡풍(橫風)이 불어 큰 파도가 일면서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떠밀려 가게 됩니다. 며칠 밤낮을 바람 부는 대로 북동 방향으로 표류한 끝에, 5월 12일에 눈 덮인 산과 울창한 숲이 있는 땅을 발견하고 정박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홋카이도였습니다.
즉, 이지항 장군 일행의 홋카이도 방문은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폭풍우)에 의한 표류 사고였으며, 이것이 결과적으로 조선인 최초로 홋카이도와 아이누족의 생활을 기록한 귀한 문헌인 『표주록』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탐험'의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표류' 끝에 미지의 땅에 닿게 된 것입니다.